판타지라는 당의정ㅣ오늘도 비는 내리고
뜬금없이 10년도 더 된 영화 <해리포터> 시리즈 중 몇 편을 다시 봤다. 현실이 마뜩잖으니 판타지 영화를 찾아보게 된다. 더럽고 곤혹스러운 현실을 정면으로 부딪쳐 해결하기보다는 눈과 귀를 닫고 의도적으로 외면하려는 자세는 문제가 많다는 걸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내 정신의 근육이 이완된 탓에 자칫 최후로 지키고 있는 문학적 감수성까지 훼손될까 두렵다. 그악스러운 현실을 판타지라는 당의정으로 면피해보려는 내 의식의 안간힘은 그 때문이다. SNS도 지겹다. 논리적 근거도 없는 각종 '썰'들의 집산지이자 싸구려 감상의 배설 창구가 된 지 이미 오래인 페이스북도 역겹다. 몇몇 식자 연하는 인사들, 특히 문인, 기자 등속의 인간들이 얼마 전부터 돼먹지 않는 견강부회로 집요하게 언어적 공해를 야기하고 있지만 대응하지 않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런 '눈의 가시'들에 대해서는 참지 않고 응전을 해왔었는데, 지금은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하는 허망한 생각만 들뿐이다. 영화는 마법이 가능한 세계에도 마법의 권능을 독점하려는 마법사들과 평범한 인간인 '머글' 사이에 갈등이 벌어진다는 설정과 결국 그것이 선악의 대결이라는 프레임으로 귀착되고 최후로 선한 세력이 악한 세력을 물리친다는 동양적인 '권선징악'으로 끝을 맺는데, 현실을 잊고자 영화를 본 나로하여금 다시 현실을 떠올리게 해 주었지만, 그래도 선이 악을 물리친다는 결말은 확실히 오늘과 같은 현실에서는 판타지가 아닐 수 없다. 현실에서 선이 악을 이기는 경우는 무척 드물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더욱더 그렇다. 관객들은 대리만족을 통해 현실에 대한 투쟁의지를 잃고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위로받고 합리화한다. 자본은 그래서 문화조차 자신의 아귀 같은 무차별적 먹성을 합리화하는 도구로 치장한다. 그리고 상당한 효과를 거둔 것도 사실이다. 자칭 비판적 지식인이라는 포즈를 취해왔던 내가 불편한 현실을 귀찮게 생각하고 술과 판타지의 세계로 침잠하는 것이 그 명백한 증거이다. 기성세대들은 이런 방식으로 점점 회색인이 되어 가는 것인가. 젊은이들에게 미안하다. 어제부터 내린 비는 오늘도 보슬비로 바뀌었을 뿐 집요하게 이어지고 있다. 차라리 저 봄비의 집요함에서 근성을 배워야 할까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