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미친 바람, 강추위 그리고.....
눈, 예보를 통해 알고 있었다. 이른 아침에는 테라스 문을 열자 예정된 눈은 내리고 있었다. 풀풀 날리다가 펄펄 내리고 이내 어지럽게 내렸다. 바로 앞 분식집 내부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은 눈이 내렸다. 실내는 저녁처럼 어두웠다. 불을 켜고 혼자 아침을 먹었다. 동생은 엄마 무덤의 잔디를 다시 덮었고 새 꽃을 사다가 화병에 꽂았다고 연락해 왔다. 나중에 들렀을 때 측백나무 잔가지를 전지했으면 좋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문자를 받고 나서 식탁에 앉아 엄마가 앉아 있던 소파와 거실의 옥장판 위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문득 쓸쓸해졌다. 부재가 자신의 존재를 명백하게 강변하는 역설의 아침이었다. 설거지를 끝내고 청소기로 집안 먼지를 청소한 후 다시 문을 열었더니 눈은 이미 그쳤고 옥상 처마에선 눈 녹은 물이 똑똑 떨어지고 있었다. 화단을 가로질러 보일러실 쪽으로 고양이 발자국이 앙증맞게 찍혀 있었다. 한기 때문에 온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오전의 해는 남은 구름 사이로 말간 얼굴을 내밀다 감추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나는 진저리를 치며 서둘러 문을 닫고 다시 밝아진 거실의 불을 껐다. 동남향의 창문으로 볕이 들고 있었다.
바람은 흡사 폭풍의 전조처럼 강하게 불어댔다. 한기를 품은 바람의 위세가 예사롭지 않았다. 거리의 눈들은 명백하게 녹고 있었지만, 바람은 모든 것을 날리고 얼려버리기라도 할 양으로 드세게 몰아쳤다. 옆 어린이집 입구에 달린 눈 결정 모양의 모빌들이 허수아비 풍선처럼 빠른 리듬으로 춤을 췄다. 2층 출입구 철문이 바람에 열려 덜컹거리다 열리곤 했다. 문이 열릴 때마다 입구의 센서 등이 점멸했다. 생전 엄마는 바람이 불 때마다 서너 겹으로 접은 두꺼운 종이를 문틈 사이에 끼워 덜컹거리는 문을 고정하곤 했다. 밤바람이 심한 날 홀로 나를 기다리다가 바깥 출입구 센서 등이 깜빡댈 때마다 엄마는 깜짝깜짝 놀랐다고 한다. 그것도 모르고 나는 “누가 들어온다고 그러세요. 현관문이 잠겼는데 뭐가 무서워요.”라며 문을 고정하는 데 골몰한 엄마를 보며 짜증 섞인 소리를 하기도 했다. 영민한 엄마는 다 생각이 있으셨던 건데…… 바람은 무언가를 시샘하는 것처럼 모질었다. 아직도 바람은 날이 서 있다.
어제부터 한파를 주의하라는 재난 문자가 계속해서 도착했다. 문자가 아니라도 추위는 구체적이었다. 눈은 오후가 되면서 대부분 녹았으나 폭풍의 전조 같은 세고 매서운 바람은 저녁이 되면서 더욱 그악스럽게 불어댔다. 요 며칠 봄처럼 따스한 날이 계속되면서 사람들은 지레 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곤 했는데 겨울은 그것이 영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곧 다가올 입춘을 앞두고 아직은 떠날 때가 아니라는 걸 강변하듯 겨울은 오늘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주고 있다. 가동 중임을 나타내는 보일러의 빨간 불빛은 지금까지 꺼질 줄을 모르고 반짝거린다. 이중 창문의 바깥 유리창도 짙은 김이 뿌옇게 내려앉고 있다. 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 밤, 저 날 선 바람과 혹한 속에서 삶의 신산함을 확인하며 몸을 움츠릴 것인지…… 이런 날 밤은 나를 겸손하게 만든다. 소소한 것에 감사하게 하고 주어진 상황을 긍정하게 한다. 내 발밑은 따뜻하다. 양말을 신지 않고도 잠을 잘 수 있다. 배고프면 꺼내먹을 수 있는 음식이 냉장고와 찬장에 그득하고 읽을 책들은 책꽂이에 빼곡하다. 하지만, 모든 경계마다 버티고 서서 경계의 안과 밖을 고립시키는 늦겨울의 매서운 추위 속에서 나는 문득 범인(凡人)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입히는 의도하지 않은 상처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지족(知足)이 타인에게 상처가 되어서야 쓰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