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청탁
한 시 전문지(물론 역사도 오래됐고 현재 많은 시인이 시를 게재하는 잡지다)로부터 내년 봄호에 게재할 시 두 편을 청탁받았다. 해당 잡지의 편집진으로 일하고 있는 선배 시인으로부터 받은 청탁이었는데, 선배는 청탁하면서도 뭔가 주저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알고 보니 원고료를 돈으로 줄 수 있는 형편이 못 되니 정기구독으로 그것(원고료)을 대신해도 되겠느냐는 말을 하려던 것이었다. 처음 청탁할 때부터 그런 사정을 솔직히 말을 했다면 내 생각이 달라졌을까. 아마도 내 성격상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튼 “신경 써 주셔서 고맙습니다.”라고 인사를 하고 났더니 비로소 그 말을 꺼내는 타이밍이라니…….
지난달까지 네 곳에서 받은 청탁과 아르코 기금 신청을 위한 시편까지 신작 13편가량을 모두 다 소진한 터라서 가지고 있는 시도 없다. 고스란히 새롭게 써야 할 판인데, 그렇게 쓴 시를 고료 없이 발표해야 한다는 게 다소 억울하긴 했다. 하지만, 지금 상당수의 순수 문학 잡지들이 경영난을 겪고 있고 <세계의 문학>이나 <유심>은 이미 폐간되기까지 했다는 걸 잘 알고 있기에 흔쾌히 그러라고 했다. 오늘 내게 청탁한 잡지는 그나마 지명도도 높고 역사가 오래된 계간지임에도 불구하고 형편이 그러한데 여타 잡지들의 형편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가끔 이런 식의 재능기부도 문학동네의 궁색함을 더불어 벗어나기 위한 의미 있는 재능기부이자 품앗이라고 자위하면서 청탁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한 달 사이에 두 편의 신작을 써야 한다. 한없이 늘어질 수도 있는 일상에 자극제가 될 수 있으니 이 또한 얼마나 좋은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