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갑작스런 서면 인터뷰, 그러나 반가운

달빛사랑 2020. 11. 10. 11:23

1. 선생님께서 지금까지 살아오신 생애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인천에서 초중고를 졸업했으며 지금까지도 ‘한결같이’ 인천에 살고 있습니다. 1995년 계간 <실천문학> 신인상으로 문단에 나왔으나 시대가 강제하는 역사적 임무를 외면할 수 없어 오랫동안 시민운동 단체에서 활동가로 일하며 시와 멀어지기도 했습니다. 현재는 인천광역시교육청 교육감 문화예술교육 정책특별보좌관, 인천문화재단의 이사로서 활동하며 청소년 문화예술교육과 지역 문화예술 발전을 위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대표 시집으로는 ≪너무 늦은 연서≫(실천문학)가 있으며 인천시 남동구 만수동 감나무가 아름다운 집에서 경제적 현실을 아랑곳하지 않고 구순의 노모와 소꿉놀이 하듯 풍경화처럼 살고 있습니다.

 

 

2. 선생님의 작품 세계는 어떠신가요? (선생님의 작품 세계에 영향을 미친 사건이나 가지고 계신 신념이 있으신가요?)

■처음 시를 쓰기 시작할 때와 최근의 경향은 다소 달라졌답니다. 뭐랄까. 좀 말랑말랑해졌다고나 할까요. 우리 시대 청년들은 원죄처럼 혹은 트라우마로 광주항쟁에 대한 상처를 가슴에 품을 수밖에 없었어요. 직접 보고 겪진 않았지만, 대학에 입학해서 은폐됐던 진실을 알게 됐을 때의 그 충격이란 엄청난 것이었지요. 따라서 자연스럽게 공부와 습작도 역사와 현실을 올바로 알기 위한 방향으로 이루어졌고, 습작 시들 또한 시대의 아픔을 드러내려고 노력한, 이른바 리얼리즘 계열의 시를 쓰곤 했지요. 하지만 지금은 (세월이 흐르면서 삶의 신산함도 겪고 세계관의 변화도 있었던 건 당연한 일) 나와 주변 지인들의 삶을 담담하게 바라보는 시, 그 속에서 함께 울고 웃고 화내며 서로를 연민하고 위로하는 시를 쓰고 있(싶)어요.

물론 예나 지금이나 포기하지 않는 시에 대한 원칙(신념)은 있어요. 솔직한 시, 정직한 시를 써야 한다는 것이지요. 아무리 그럴듯하게 윤색하더라도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하고 독자에게 정직하지 않은 시는 생명력이 없는 시이지요.

 

 

3. 선생님께서 시인이 되고자 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언제부터 시인이 되고 싶으셨나요?)

■저는 청소년 시절부터 책 읽기를 무척 좋아했어요. 제물포고 재학시절, 수업 시간에도 소설책을 읽다가 선생님께 혼난 적도 많답니다. 그렇다고 구체적으로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에요. 독실한 기독교 신앙을 가진 부모님의 뜻에 따라 목사님이 되고 싶다는 생각은 한 적 있어요. 하지만 글 쓰는 것은 좋아했어요. 학생 시절 연애편지 대필도 많이 해줬지요. 그렇게 청소년 시절을 보내고, 대학에 들어가 ‘연세문학회’에 가입을 하게 되었지요. 그곳에서 정말 좋은 문우(文友)들을 많이 만났어요. 지금은 무척 유명한 기형도, 성석제, 나희덕 등의 시인들과 정현종, 마광수 등 좋은 선생님을 알게 된 후, 본격적인 습작 시대를 열어가게 되지요. 그냥 자연스럽게 시를 쓰게 된 것 같아요. 어느 시점부터라고 특정하기 어려운……. 하지만 굳이 생각해본다면 대학 문학회 시절부터 문학가의 삶을 동경했던 건 사실입니다. 시를 쓰건 소설을 쓰건 혹은 평론을 하건 문학은 평생의 친구이자 목표가 될 거라고 그때부터 생각했으니까요.

 

 

4. 많은 문학 장르 중 ‘시’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위에서도 말했지만, 사실 대학과 대학원 시절, 저는 소설도 쓰고 평론도 썼어요. 다만 제 호흡이(이건 글 쓰는 분들은 이해할 테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도 설명하기 어려워요) 산문보다는 시가 맞았어요. 물론 어린 시절에는 시인이란 단어와 좋아하는 시인들이 보여준 모습에서 환기되는 로맨틱한 분위기도 좋았고요. 위대한 시인임에도 소설은 단 한 편도 쓰지 않았고, 훌륭한 소설가지만 시집 한 권 내지 않은 분들이 대부분이라는 게 바로 그 글 쓰는 사람의 고유한 ‘호흡’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건 또 해당 작가(시인과 소설가를 포함한 모든 장르의)의 감수성, 감정의 결, 삶의 방식 등 여러 층위에 의해 결정되지요. 저에게는, 저의 감수성에는 시가 맞았어요. 따라서 어느 시점에서 내가 ‘시를 선택해야지’ 하고 선택한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시가 나를 선택했다고 하는 게 오히려 맞는 말일 겁니다. 어려운가요?

 

 

5. 선생님의 시 중 가장 좋아하는 시 한 편을 소개해주시고 그 이유도 말씀해주세요.

■참 어려운 질문인데, 그래도 첫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너무 늦은 연서>라는 시에 맘이 많이 가지요.

 

많은 빛들이 살았지

내 쪽에서 등을 진 빛

무심하게 방치한 빛

감당하지 못하자

스스로 나를 떠난 빛

잃은 빛과 잊힌 빛

나를 떠난 빛 사이에서 자주 현기증을 느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나를 떠나지 않은 채

나와 함께 빛나 온

대견하고 고마운 빛

무뎌진 그리움일망정

끝끝내 지키고 싶은

결코 잃어서도 안 되고

잊을 수도 없는 빛

또는 빚, 당신

― 「너무 늦은 연서(戀書)」

 

누구에게나 그런 사람이 한 사람쯤 있잖아요. 일생을 살면서 늘 빛이 되어 주었기에 어느 날 문득 크나큰 마음의 ‘빚’으로 다가오는 사람. 애인이 될 수도 있고 어머니가 될 수도 있겠지요. 그런 분들에게 왜 일찍 마음을 표현하지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을 담아 본 시예요.

 

 

6. 좋아하는, 존경하는 시인이 있으신가요?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선생님의 롤모델)

■ 존경하는 시인은 참 많아요. 칠레의 저항시인 파울로 네루다도 존경하고 한국 시인으로는 김수영과 신경림, 천상병 시인을 좋아합니다. 가깝게는 (제 대학시절 이미 이른 나이에 작고하셨지만) 연세문학회 활동을 함께 했던 기형도 시인을 좋아하지요. 사람마다 시적 취향이 있겠지만, 일단 그분들의 시가 시 미학적으로도 좋을 뿐만 아니라 그분들이 살아온 삶 역시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고민하는 치열한 삶을 살았던 분들이거든요. 시인은 늘 깨어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시대의 변화를 읽어내고 사물의 내밀한 속삭임도 엿들을 수 있는 감수성 또한 있어야 하고요. 위에 열거한 시인들은 자신의 시를 통해 그것들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존경하고 좋아합니다.

 

 

7. 시인이 되기를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으신가요?

■시인이 되기를 꿈꾸고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나는 그 젊은이들은 아름다운 영혼의 소유자일 거라고 확신합니다. 모든 것이 환금성으로 치환되는 이 휘황한 자본주의 시대에 전혀 실생활에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 시 쓰기를 고민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잖아요. 하지만 시를 쓰는 것은 세상을 다른 시선으로 본다는 것이고 사소한 것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일이지요. 영혼의 울림을 포착해 내고, 사물과 대화할 수 있게 되는 일이기도 하고요.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요? 주저하지 마시고 황홀한 고통과 아름다운 고뇌의 시간 속으로 들어오세요. 백지를 앞에 놓고 펜을 들었다면, 혹은 모니터를 앞에 두고 키보드를 두드리며 시 쓰기를 고민하고 있다면 이미 여러분은 시인입니다. 다만 시 쓰기도 노력이 필요하답니다. 인풋이 없는데 아웃풋이 있겠어요? 따라서 중국 구양수 선생의 말처럼 (좋은 작품들을) 많이 읽고, 많이 써보고, 많이 생각해야 합니다. 길을 가면서도, 잠자리에 들어서도 혹은 버스나 전철 안에서도.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면 휴대폰 녹음기 어플을 실행해 생각을 옮겨 놓으세요.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시 쪽에서 여러분의 손을 슬며시 잡아 줄 거예요.

 

 

8. 마지막으로 위 질문을 제외하고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자유롭게 작성해주세요♡

■무슨 과목 과제인지 알 수 없지만, 흥미롭고 실용적인 많은 소재를 놔두고 시인을 인터뷰하는 과제를 내주신 선생님의 마음이 가을하늘처럼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고등학교 시절 시 창작 강의를 들었던 오래된 인연을 잊지 않고 나를 떠올려준 은영이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코로나바이러스가 기승을 부리는 이 짐승의 시간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은 바로 여러분들과 같은 따뜻한 마음들 때문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