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하늘 위에 정의와 평화의 성호를 긋습니다
한반도 하늘 위에 정의와 평화의 성호를 긋습니다
―고 김병상 필립보 몬시뇰의 영원한 안식을 기원하며
한때 우리는 치욕스럽고 모순된
이 땅의 구호들과 맞서야 했습니다.
허울뿐인 민주주의를 혁파하고
진정한 민주주의 쟁취를 외쳐야 했던 시대
말뿐인 자유와 평등을 갈아엎고
온전한 자유와 평등의 쟁취를 위해 싸워야 했던 시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헌법 1조 2항조차 지켜지지 않던 시대
주인이 되어야 할 노동자 민중은
소외되고 억압받고 사선을 넘던 시대
절망만이 사신의 망토처럼 시대 위에 드리워져
모든 진실과 정의와 친구들의 내밀한 서신마저
유언이 되고 비어가 되어 떠돌던 시대
김병상 필립보 몬시뇰 당신은
그 모든 시대의 모순과 현실의 부조리 속으로
뚜벅뚜벅 올곧게 걸어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일상과 당신의 기도와
끝내는 당신의 꿈속까지 따라온 준엄하면서도 두려운
신탁의 쓴 잔을 마주한 당신의 고뇌를 생각해 봅니다.
“리베라 메, 도미네. 리베라 메, 도미네.
주여, 우리를 구하소서, 주여, 우리를 구하소서.
당신의 의와 나라를 이곳에 펼치소서”
젊은 사제의 가슴을 격동시킨 시대의 부름을 떠안기 위해
당신의 기도는 절박하고 길고 뜨거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길고 긴 기도 끝에 당신은 마침내
가장 낮은 곳으로 임하신 예수처럼
가장 소외되고 억압받는 고통의 현장으로 내려갔습니다.
어둠의 장막을 열어젖힌 빛의 연대, 그 강고함을 경험하면서
이 땅의 민주주의와 자유와 정의, 억압받는 이들의 해방을 위해
화육한 예수처럼 당신은, 당신의 기도와 위로가 필요한 곳으로
내려가고 달려가고 머물며 함께 했습니다.
패덕한 독재 군주, 그 탐욕의 산물인
유신헌법 철폐를 요구하던 그 밤,
그 신산한 새벽을 홀로 건너던
당신의 고독과 당신의 두려움을 생각합니다.
그때 당신은 갯세마네 동산에서 홀로 기도하던
고뇌하는 예수를 닮아 있었습니다.
인간 최소한의 권리를 요구하던 노동자들에게
인분을 쏟아붓던 추악한 자본의 본산 동일방직,
그곳에서 해고된 노동자들과 연대할 때,
정의구현사제단의 공동대표를 맡아 군사독재와 정면으로 맞설 때,
그때 당신은 교회 안에 몰려든 삿된 무리를 향해
채찍을 휘두르던 혁명가 예수를 닮아 있었습니다.
굴업도 핵폐기물처리장 건설 계획을 무산시키고
민족문제연구소의 이사장으로 일하며
교회는 젊은 사람들을 키워야 한다고 힘주어 말할 때는
산상(山上)에서 허다한 민중과 지혜를 나누던
엄격하지만 자애로운 교육자 예수를 닮아 있었습니다.
그 모든 당신의 노력과 다양한 연대와
끝없는 헌신과 대가를 원치 않은 희생 속에서
우리는 이만큼의 민주주의와 또 이만큼의 화평을 이뤘습니다.
우리는 당신이 이 땅에서 보여준 삶에 빚진 바가 많습니다.
당신이 이곳에서 못다 이룬 숙원은 빚진 우리의 몫이 되었습니다.
하여, 민주와 자유, 평등과 평화의 길은 고독한 길이지만
우리는 뚜벅뚜벅 그 길을 걷겠습니다.
진리와 정의가 승리하는 그 길은 험하고 힘든 길이지만
우리는 더불어 연대하며 그 길을 가겠습니다.
당신의 뜻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이뤄야 할 과제를 가슴에 새기면서 말입니다.
김병상 필립보 몬시뇰 신부님,
이제 주님의 성실한 사제이자 민중의 든든한 벗이었던
당신의 영원한 안식을 기원하면서
당신을 기억하는 모든 이들과 한반도 하늘 위로 성호를 긋습니다.
이 땅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백두에서 한라를 잇는 성호를 긋고,
지역과 계층의 갈등을 극복하고 진정한 정의의 실현을 위해
동해에서 서해 끝으로, 조국의 허리 위를 가로지르는 성호를 긋습니다.
레퀴엠 아테남 도나 아이스, 도미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