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한 인간의 죽음을 대하는 방식 혹은 예의에 대하여

달빛사랑 2020. 7. 11. 20:26

 

 

한 사람이 죽었다. 그것도 산속에 들어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가 죽자 그의 죽음에 얽힌 확인되지 않은 소문들이 비어(飛語)처럼 떠돌았다. 평소 그가 살아왔던 삶의 방식과는 부합하지 않는 소문이었다. 그는 착하고 양심적인 변호사였고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서 헌신해 온 재야운동가이기도 했다. 죽기 직전까지 서울시장으로서 친서민적인 훌륭한 행정을 펼치기도 했으며 차기 대선후보 중 한 명으로 거론되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죽자마자 인터넷과 SNS에는 그에 관한 추문이 불길처럼 번졌다. 그가 재직 중 여비서를 여러 차례 성추행했고, 해당 피해 여성은 죽기 며칠 전 그를 위계에 의한 성폭력 혐의로 경찰에 고발했다고 한다. 고발이 기정사실이 되자마자 그는 짧은 유서를 남긴 채 홀로 배낭을 메고 산으로 들어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재야운동가 출신 행정가 하나가 성 추문으로 인해 그렇듯 허망하게 우리 곁을 떠난 것이다.

 

그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자 많은 사람은 그에 대한 소문을 사실로 단정하며 그에 대한 비방과 욕설로 SNS를 도배하고 있다. 특히 일부 급진 페미니스트의 비난은 일베의 그것과 다르지 않을 정도로 저열했다. 비판을 빙자한 욕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진보정당 계열의 여성 정치인들은 그에 대한 조문을 거부한다는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다. 평소 진보적 색채의 그에 대해 비우호적이었던 보수 우파들은 물 만난 고기처럼 그를 모욕했다. 그들은 심지어 장례절차를 시빗거리로 삼기까지 했다.

 

물론 한 사람의 전사(前史)가 아무리 훌륭했다 하더라도, 생전에 그가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면 죽음은 결코 그 잘못을 덮어줄 수 없다. 고인에게는 서운한 말이겠지만 공은 공이고 과는 과다. 더구나 성폭력 가해자가 틀림없다면 그의 죽음으로 인해 피해자는 감당할 수 없는 큰 충격에 빠져 정신적 아노미 상태가 되었을 게 뻔하다. 그리고 죽은 이를 따르던 지지자들은 피해 여성의 신상을 파헤쳐 2차 가해를 시도할 것도 예상할 수 있다. 그들은 그녀의 터무니 없는 고발 때문에 그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고소 내용이 사실이라면 그녀는 보호받아야 할 사람이지 사회적 린치를 당해서는 안 될 사람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를 비판하는 쪽이나 옹호하는 쪽이나 결코 상대의 말은 들으려 하지 않고 오직 자신들의 생각만 강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에게서는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찾아볼 수가 없다. 한 사람의 비극적 죽음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려는 세력들도 눈에 띈다. 심지어 ‘가로세로연구소’라는 쓰레기 유튜버 3인은 고인의 빈소 근처까지 와 생중계를 하며 킬킬거리기까지 했다. 한 인간이 얼마 잔인해지고 타락할 수 있는지를 확인하게 되는 대목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성학자 강남순 교수의 다음과 같은 언급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상략) 인간 속에는 ‘피해자-가해자’의 가능성이 언제나 복합적으로 도사리고 있다. 그 어떤 표지가 붙었든 한 사람의 죽음 앞에서 ‘애도’하는 것—인간으로서의 가장 근원적인 존재방식이다. 그 누구의 죽음이라도 ‘조롱받을 죽음’이란 이 세계에 없다. 죽음을 선택한 그와 ‘함께,’ 그리고 그를 ‘넘어서’ 보다 인간의 권리가 확장되는 서울, 한국을 만들어가기 위한 과제를 우리 각자의 어깨위에 짊어져야 하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한국의 정치사에서 여러 가지 소중한 업적을 남긴 한 사람의 죽음 앞에 나는 애도한다. 그가 아무런 흠 없는 ‘순수’한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지닌 여러 가지 약점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매 죽음마다 세계의 종국”이기 때문이다.”

| 한 사람의 죽음 앞에서, 열광적 ‘순결주의’의 테러리즘 | 강남순(텍사스 크리스천 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