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늦은 부고(訃告)
얼마 전 모교 선배이신 강창민 시인이 보내 준 신작 시집(『생각의 강을 건너』)을 읽다가, 형수인 강경화 시인이 10여 전 돌아가셨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강경화 시인 역시 모교 선배이자 문학회 선배였다. 동성동본 결혼이 금지되던 시기 동성동본이셨던 두 분의 애틋한 사랑과 결혼 얘기는, 극적인 걸 좋아하던 감수성 예민한 문학회 후배들에게 휘황한 아름다움을 품은 하나의 전설이었다. 재학시절 강창민 선배는 시화전이나 낭송회와 같은 문학회 행사가 있을 때마다 매번 후배들을 찾아와 격려해주곤 했다. 반면 강경화 선배는 자주 볼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어 지금은 얼굴조차 제대로 기억나질 않지만, 그 이름만은 강창민 선배와 함께 늘 기억 속에 있었다. 그런데..... 강창민 선배의 시집(詩集)를 읽다가 아내의 죽음을 소재로 한 시들을 만난 것이다. 여러 작품이었다. 순간 가슴이 섬뜩해져 인터넷을 검색했다. '시인 강경화'로 검색했지만 선배의 인물 정보는 검색되지 않았다. 방법을 바꿔 알라딘에 들어가 저서를 검색한 후 저자 정보를 확인했더니 그곳에 비로소 출생에서 사망까지의 연보가 나열되어 있었다. 그곳을 통해, 강경화 선배는 완치 판정받았던 유방암이 재발해 2009년에 작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인연이란 얼마나 견고한 것이고, 운명이란 또 얼마나 얄궂은 것인지…… 얼굴도 기억도 희미질 정도로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문득 선배의 죽음을 자신의 부군(夫君)이 쓴 시집을 통해 알게 되다니……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졌다. 홀로 남은 강창민 선배는 또 얼마나 외롭고 힘들 것인가. 이별의 슬픔이란 유한한 인간이 필연적으로 짊어진 업이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마음이 많이 아프다. 늦게나마 강경화 선배의 명복을 빈다. 그곳에서는 아프지 않고 편히 쉬기를!
부고도 없었는데..... 동창 하나가 또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친구에 이어 올 여름에만 두 명의 친구와 이별을 한 것이다. 부고와 영별에 익숙해질 나이가 됐는데도 가족과 친구의 죽음은 매번 낯설다. 함께 했던 추억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무슨 이유에서 부고를 띄우지 않은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늦게라도 알게 되서 다행이다. 얼굴이 까맣고 눈이 커다랗던 말이 없던 친구 윤은상, 이제 슬픔도 고통도 없는 하늘나라에서 편히 쉬기를.....
저녁에는 옛날 노동운동 후배 최애란과 만나기 위해 갈매기에 들렀다. 한 달 전부터 꼭 나에게 술 한 잔을 사주고 싶다는 말을 해왔던 터였다. 그녀는 옛날부터 많이 웃는다. 그 웃음이 주변 동료들에게 밝은 에너지를 준다. 그렇다고 매사를 웃음으로 얼버무리는 것은 아니다. 최근까지 몸담았던 노동당에서의 활동은 물론이고 현재 열정적으로 매진하고 있는 두레생협 활동에서도 그렇듯, 그녀는 항상 고민하는 활동가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옳지 않은 것과는 결코 타협하지 않으려는 원칙론자로서의 고집도 있다. 세 아이의 엄마로서, 생협활동가로서 그녀는 오늘도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 중이다.
그녀의 남편 병렬이는 영창악기 노조민주화투쟁 과정에서 해고된 해고 노동자다. 현재는 인쇄업을 하고 있는데 사업이 제법 잘 되는 모양이다. 차도 외체차를 몰고다니고 얼마 전부터는 골프도 시작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할 때 애란이는 나의 눈치를 보며 무척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물론 해고노동자와 외제차, 골프는 쉽게 연결이 되지 않아 나도 좀 의외라는 생각을 하긴 했다. 하지만 사업을 시작한 이상 직원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파렴치한 악덕 업자가 아니라면 그 세계(사업자들의 세곈)의 룰과 문화를 어느 정도는 수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골프도 이제 옛날처럼 귀족 스포츠가 아니기 때문에 단지 골프를 친다는 이유만으로 반노동자적 정서에 침윤되었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자본은 무척 교묘하고 냉혹하고 교활하기 때문에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인간을 배금과 물신주의에 빠져들게 만든다는 것을 병렬이 자신이 특히 경계할 필요는 있을 것이다. 노동자 출신인 그가 여전히 노동자의 권익과 사회 민주화에 관심이 있다면 말이다.
둘만 만나는 것은 심심할 거 같아서 환경운동연합 대표인 심형진 선배를 불러서 함께 했다. 혁재는 물론 선착해 있었기 때문에 4명이 술을 마셨다. 두어 시간 뒤에 병렬이가 도착했다. 얼굴도 보고 싶었고, 늦은 시간 영종도까지 가야 하는 애란이를 데려가라고 내가 불렀기 때문이다. 힘든 시절 만나서 오늘날까지 예쁘게 살아가고 있는 두 후배가 대견하고 고마웠다. 술판을 정리할 때쯤, 병렬이가 시계를 하나 주었다. 명품 시계 짝퉁이라며 주면서도 웃었다. 나도 내가 차고 있던 시계를 벗어 애란이에게 주었다. 내 시계는 짝퉁이 아니라 세이코 알바 정품시계였다. 값으로 따진다면 내 시계가 훨씬 비싼 시계다. 다만 구입한 지 10여 년이 넘어 시계유리 표면에 흠집이 나긴 했지만.... 부등가 교환인 것은 확실하지만, 그게 술판의 재미이자 관계를 지속하게 만드는 매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미련없이 벗어줬던 것이다. 이튿날 술 깨면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