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맛비 기분 좋게 내린 날
잔뜩 찌푸린 하늘을 보며 집을 나섰다. 지하철역에 도착했을 때쯤 빗방울이 떨어졌다. 6시, YWCA 사무실에 들러 50년사 집필 상황을 설명하고 Y에서 준비할 것들을 정리해 주었다. 올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Y에서 일하는 분들은 하나 같이 얼굴이 환하고 웃음소리가 크다. 작은 칭찬에도 크게 감동하고 몸에 밴 친절이 자연스럽게 발현된다. 크리스천의 향기란 아마도 이런 것이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 시간가량의 회의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빗방울이 굵어졌다. 두어 정거장 걸어서 갈매기에 들렀다. 월요일이었고 비가 내리니 그건 필연이었다. 혁재와 산이가 늘 앉던 자리가 아닌, 창가 쪽에 앉아서 술 마시고 있었다. 서울에서 내려오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내가 도착하고 30분쯤 지나자, 이태원에서 술집을 한다는 여성 한 명과 시를 노래로 부른다는 가수 한 명이 혁재와 산이가 있는 테이블에 합류했다.
나는 세 시간 동안 혼자 앉아 술을 마셨다. 비만 아니라면 조구 형이 내 앞에 앉아 계셨을 게 분명하지만……. 비가 와서 그런지 술집은 무척 붐볐다. 시간이 지날수록 빗줄기는 점점 거세졌다. 빗줄기가 거세질수록 나는 더욱 감상적인 마음의 상태가 되어갔다. 서너 팀의 손님들이 빠져나가자 혁재가 앉은 자리에서 노랫소리가 들렸다. 가수가 두 명이나 앉은 자리라서 노래가 끊이질 않았다. 손님들은 다른 이야기를 하다가도 노래가 끝날 때마다 박수를 보냈다. 나도 속으로 ‘희망가’를 읊조리며 술을 마셨다. 그러면서 마음도 서서히 감상적으로 변해갔다. 담배 피우러 나가서는 비 내리는 하늘을 한참 동안 올려다보다 들어오곤 했다. 가로등 불빛에 반사된 빗줄기가 무척 예뻐 보였다.
마지막 잔을 마실 때, 라디오에서는 양희은의 ‘내 님의 사랑은’이라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사랑스러운 그대여, 내 꿈에 돌아오라.” 쳇, 사랑한다면 왜 하필 꿈에서 만나자는 것인지…… 사랑스러운 그대라면 현실에서 내 앞에 나타날 일이지…… 네 병 가까이 마셨는데도 취하질 않았다. 하지만 전철 시간 맞춰서 일어났다. 그때까지도 새로운 손님들은 연신 들어왔다. 확실히 술집은 비 내리는 날이면 더욱 붐빈다. 오늘처럼 장맛비가 내려준다면 스스로 정서적 무장해제가 될 용의가 나에게는 있다. 돌아오는 길, 거리에 고인 빗물 밟는 느낌이 너무 좋아서 아이처럼 몇 차례 찰박거렸다. 집에 와서는 컵라면 두 개를 먹어 치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