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이 필요하지 않은 세상을 희망하며
경자년 새해가 열렸습니다. 해가 바뀌었다고 어제까지와 전혀 다른 삶이 갑작스레 펼쳐질 리 만무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해의 벽두에는 모든 ‘입’들이 열리고, 필부필부들의 유효기간 3일짜리(작심삼일) 온갖 결심부터 한 나라의 국정방향까지 참으로 많은 결심과 희망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올해는 국회의원 선거가 있는 해라서 출사표를 던진 많은 후보들의 공약 또한 허다한 결심과 희망들 위에 겹겹으로 얹힐 게 분명합니다. 말이란 얼마나 가벼운 희망의 의장(衣章)인지요.
상황을 비관적으로 볼 것만은 아니지만 국내외 정세는 가팔라 숨 가쁘고 국민들의 삶의 형편도 나아질 거라는 확신이 서질 않습니다. 중동을 비롯한 이역(異域) 곳곳에서는 연말에도 여전히 폭탄이 터지고 살점이 튀었고 상황은 새해에도 오리무중입니다. 북한과 미국의 힘겨루기도 임계점을 향해 가는 듯하고 국내의 정치 지형 역시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울 정도로 극한 대립을 보이고 있습니다.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은 오늘도 가두에서 투쟁으로 분주하고 고공으로 올라간 한 노동자는 200여 일이 넘도록 땅을 밟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은 장밋빛 희망만을 이야기하고 정치인은 민주주의와 국민을 소리 높여 외치고, 권력남용의 주체들은 오히려 떠세하며 견강부회의 논리로 기득권을 옹호하려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민주주의와 정의, 대화와 소통, 배려와 이해란 단어는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사(修辭)로 전락한 지 오래입니다. 민주와 정의를 소리 높여 외치는 세력이 사실은 가장 반민주 비정의 세력이라는 말이 저항감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는 형국입니다. 한 노동자로 하여금 원치 않는 유배를 떠나게 해놓고도 사람들은 너무도 평온한 아침 식탁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절망적 상황이 오히려 희망을 호명(呼名)할 적기(適期)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이 진부해 보이는 언명(言明)이 갖는 힘은 구체적 경험 속에서 우리가 확인한 바이고 허다한 우리의 경험이 축적한 역사가 증명해왔습니다. 두들길수록 강해지는 강철처럼, 비 온 뒤에 더욱 단단해지는 대지처럼 시련과 고난 앞에서 더욱 견고해지는 극기와 연대의 벅찬 경험들을 민중은 경험해 왔던 것이지요. 하여 이제는 희망을 이야기 할 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 ‘그렇기 때문에도’ 희망입니다.
기실 좋은 세상이란 새삼스레 희망을 꿈 꿀 필요가 없는 세상일 것입니다. 역설 같지만 나는 희망이 필요하지 않은 세상을 희망합니다. 범인(凡人)의 희망이란 대개가 삶의 형편이나 자신의 존재조건을 개선하는 것들입니다. 팍팍한 가정경제가 좋아지길 희망하고, 아픈 몸의 쾌유와 가족의 건강을 희망하고, 좋은 반려를 만나길 희망하고, 장수(長壽)와 마음의 평안을 희망합니다. 좀 더 대승적으로 희망한다면, 자신이 바라는 정치의 구현을 희망하고, 전쟁의 종식과 평화를 희망하고, 빈부대립이 없는 세상과 각종 차별이 없는 세상, 신념의 차이가 존중되는 세상을 희망합니다.
꿈같은 일이겠지만, 그래서 여전히 허다한 희망들은 가끔 성취의 기쁨을 주기도 하고 자주 고문 같은 상실감으로 우리를 헛헛하게 만드는 법이겠지만, 만약 그 모든 것이 자연스레 이루어지는 세상이라면 굳이 희망의 목록을 열거할 필요가 무엇이란 말인지요. 이루어지지 않아서 여전히 희망인 것이라면 새삼스런 희망이 필요하지 않은 세상을 희망하는 이 역설 또한 여전히 유효한 나의 희망이자 꿈인 것입니다.
새해 벽두는 미덥지 않은 희망조차 허락되는 시기입니다. 이기적 희망부터 이타적인 희망까지 모든 것이 용인되는 그야말로 ‘꿈의 시간’인 것입니다. 하여 나는 늘 가져왔던 희망 목록에 기꺼운 마음으로 하나의 희망을 새롭게 올려봅니다. 그것은 바로 열심히 일하며 자신의 주변에 성실했던 당신, 바로 당신의 그 소박한 그러나 소중한 꿈이 이루어지길 희망한다는 것입니다. 당신 또한 나의 꿈 나의 희망을 위해 기도해준다면, 아, 그보다 아름다운 일이 있을까요. 당신과 나로부터 시작되는 이 기도의 선순환이 우리로부터 저들에게까지 확장된다면 세상은 조금 더 아름다워질 것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남은 날들이 온전히 당신과 나, 우리 모두의 날이 되기를 다시 한 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