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종일 영화만 보다
크리스마스를 엄마와 함께 집에서 보낸 게 얼마 만인지. 작년까지는 성탄이브와 말일을 대부분 주점 갈매기에서 보냈다. 하지만 올 해는 엄마와 함께 보내기로 맘을 먹었다. 나올 수 있느냐는 두어 통의 전화를 받았지만 거절했다. 대신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찜해둔 영화를 몰아보았다. 심각한 영화는 미뤄두고 대체로 감성적인 영화만 골라봤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퀴어 감성의 영화 <윤희에게>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보고 나서도 한참 동안 가슴이 먹먹했다.
사춘기 시절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동성(同性) 친구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키워가다가 결국 통념의 장벽과 부모의 반대를 넘어서지 못한 채 '첫사랑'과 원치 않는 이별을 해야 했던 윤희. 어느 날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던 그녀 앞으로 한 통의 편지가 도착한다. 우연찮게 편지를 몰래 읽어본 딸 새봄(김소혜 분)은 편지의 내용을 숨긴 채 발신인이 살고 있는 일본으로 여행을 가자고 윤희에게 제안한다. 여러 삶의 조건들 때문에 망설이던 윤희도 결국 딸의 제안을 수락하여 함께 여행을 떠난다. 그녀의 첫사랑 쥰이 있는 곳으로....
딸 새봄과 함께 여행을 떠난 윤희는 끝없이 눈이 내리는 그곳 오타루에서 (속 깊은 딸 새봄의 의도된 연출에 의해) 마침내 첫사랑인 쥰을 만나게 되는데……, 그 인상적인 장면을 연기한 김희애의 표정은 명불허전, 정말 잊을 수가 없다. 그저 말없이 바라보다 눈물을 주르르 흘리는.... 눈빛 만으로 서로가 겪어 왔던 지난 시간의 가슴속 말들을 온전히 풀어내고 있던 바로 그 장면..... 압권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과 같은 정시우 평론가의 영화평에 나는 전적으로 공감한다.
“조용히 내리지만 수북이 쌓이는 눈처럼, <윤희에게>의 감정들 역시 느린 호흡으로 담담하게 흐르지만 종국엔 인물 내면에 스며있는 격랑을 들여다보게 한다. 사회적 편견에 의해 ‘외로움’을 앓아야 했던 무수히 많은 윤희들에게 보내는 편지. 편지에 더해진 추신이 관객 마음의 빗장을 기어코 봉인 해제시킨다. 이 영화에서 김희애는 고요해서 더 강하다. 아직도 생성 중인 데뷔 36년차 배우의 저력.”
영화의 말미, 쥰의 편지에 대한 윤희의 답신이 내레이션으로 소개되는데, 그 마지막 추신 “나도 네 꿈을 꿔.” 이 한마디에 관객들은 모두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경험했을 것이다. 모든 사랑은 소중하고 아름답다. 나 역시 세상의 모든 '윤희들'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