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이 없는 시인의 변명
문청시절까지 포함하면 시를 쓰기 시작한지 수십 년이 흘렀네요. 중간에 ‘외도’를 하긴 했지만 시를 가슴에서 놓은 적은 없었습니다. 첫 시집의 ‘작가의 말’에서도 밝혔듯 어쩌면 내가 시를 붙잡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시가 나를 붙잡아주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기나긴 세월 동안 그저 마음의 울림을 어쩌지 못해서, 다시 말해 쓸 수밖에 없어서 쓴 적도 있고 활자화에 대한 막연한 욕망이나 과시욕 때문에 쓴 적도 있으며 때때로 특정한 상황과 단체, 인물로부터 요구받은 구체적인 내용을 시로 쓴 적도 있습니다. 시를 쓴 세월만 놓고 본다면 제법 치열하고 그럴듯한 시인의 삶을 살아온 것도 같지만 현재 나는 고작 한 권의 시집밖에 내지 못한 불성실한 무명시인일 뿐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당신은 무엇 때문에 시를 쓰십니까?” 혹은 “시는 당신에게 과연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해오곤 합니다. 진부한 질문이지요. 하지만 그 진부함을 반박할 수 있는 적절한 대답을 나는 갖고 있지 못합니다. 특히 ‘내가 시를 쓴 것이 아니라 시가 나를 때때로 불러주었고 힘든 날에 시가 나를 붙들어 주었으며 따라서 결국 시를 쓴 것은 시 자신입니다. 시가 나를 쓴 것이지요.’라는 대답을 어떻게 해줄 수 있겠습니까. 그 선문답 같은 대답의 의미를 질문한 상대가 과연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요. 나는 확신할 수가 없습니다. 상대는 어쩌면 ‘시 쓴다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겉멋만 들어서 대답이 궁할 때는 꼭 저렇듯 모호하게 대답을 한다니까’하고 속으로 비웃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나는 그 ‘비웃음’을 탓할 생각이 없습니다. 나조차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대답을 상대가 어떻게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나는 이런 질문이 무척 곤혹스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이런 질문을 해온다면 나는 앞으로 그 사람에게 “당신은 무엇 때문에 밥을 먹습니까? 당신은 무엇 때문에 비 오거나 눈 내리는 날이면 문득 고즈넉해지는 거지요? 거리를 지나다 파지 줍는 노인의 굽을 등을 보았을 때 혹은 그분들과 눈이 마주쳤을 때 왜 당신의 한쪽 가슴은 먹먹해지는 거지요? 당신은 무엇 때문에 책을 보거나 영화를 보다가 간혹 눈물을 흘립니까. 당신은 무엇 때문에 좋은 노래를 찾아 듣고 힘들거나 지칠 때 그 노래를 입으로 흥얼거리는 거지요?”라는 질문을 해볼 생각입니다. 그가 “글쎄요. 설명하기 어렵군요.”라고 대답한다면 나 역시 “글쎄요. 설명하기 쉽지 않군요.”라고 대답할 것이고, 그가 “살려고요”라든가 “좋으니까요”라고 대답한다면, 나 역시 “그래요. 저도 살려고 시를 써요. 좋아서 시를 써요.”라고 대답해 줄 생각입니다.
자신만의 정제되고 논리적인 시론을 갖고 있는 시인들은 얼마나 좋을까요. 부럽고 존경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