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우린 정말 사랑했던 걸까

달빛사랑 2019. 9. 16. 03:11

오래전 신촌로터리 버스정거장에서 밸런타인데이 선물을 주고 이별을 고한 애인의 심리를 한동안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대낮부터 만나 차를 마시고 밥을 먹고 술을 마실 때까지도 그녀는 어제와 똑같은 오늘의 그녀였을 뿐이다. 특별한 감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날은 밸런타인데이, 여성이 남성에게 초콜릿을 선물하는 날이었다. 피차 운동권이었고 당시 학생운동권의 분위기상 정체불명의 기념일을 챙기는 것에 대해 부정적이었으므로 곱게 접은 종이학과 초콜릿이 담긴 유리병을 받았을 때 어색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나는 기꺼이 감동했고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술집을 나왔을 때는 눈발이 날렸다. 애인으로부터 사랑 고백에 다름없는 초콜릿 선물을 받았고 손을 잡고 함께 걷는 거리 위로는 늦겨울 눈발이 꽃처럼 날렸다. 모든 것은 완벽하게 로맨틱했다. 집에 가기 위해 신촌로터리 삼화고속 정거장까지 걸어오면서 나는 시대의 질곡이나 운동의 대의 따위는 개나 주라는 심정이 되어 마냥 행복했다. 그러나…….

 

그녀는 홍익문고를 지나 정거장이 가까워 올 때쯤, “우리 이제 그만 만나야 할 것 같아요.”라고 말을 하며 눈물을 보였다. 그 순간 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으나 이 무슨 황당한 상황이지라는 생각으로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마음을 추스르고 내가 던진 한마디는 도대체 왜?”였다. 그녀는 대답대신 어깨를 들썩이며 울기만 했다. 그 모습이 하도 처연해 나는 이별의 이유를 묻기보다는 그녀를 위로하고 먼저 들여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알았어. 일단 집에 들어가. 내일 연락할게.”라고 말하며 등을 두드려 줄 때쯤 버스가 도착했고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버스에 올랐다. 승객들이 모두 승차할 때까지 정거장에 서있던 그녀는 창문 쪽에 앉은 나를 보고 손을 흔들어 주었다. 한 손으로 입을 막은 채였다. 손을 흔들면서도 그녀는 울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나도 역시 짧게 손을 흔들다 주먹 쥔 손에서 엄지와 약지를 펴 전화모양을 만든 후 전화할게라는 포즈를 취하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날 밤 그렇게 헤어진 이후, 그녀와 나는 다시 만나지 못했다. 물론 전화는 서너 통 주고받았고 교정이나 강의실에서도 서너 차례 만났지만 연애가 다시 이어지진 않았다는 말이다. 그녀는 그날이후 무척 담담해져 있었고 그런 그녀가 낯설어진 나는 더욱 감정을 추스를 수가 없었다. 함께 했던 부산과 제주도 여행, 그곳에서 만난 나의 지인들과의 즐거웠던 기억, 산방굴사 아래 용머리해안에서 마시던 커피, 대구 친구 집에서 보냈던 하룻밤, 함께 갔던 백마와 허다한 술집들의 추억이 생생했던 나에게는 너무도 고통스런 시간의 연속이었다. 도대체 무엇이 우리를 갈라놓은 것인지 가늠할 수 없어서 더욱 힘이 들었고 당연히 나는 나날이 피폐해졌다. 뒤돌아 생각해 보면 그때 동지들과 문학이 아니었다면 나는 아마도 가공할 상실의 심연으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대가 강제하던 임무와 역할, 더디긴 하지만 효과 확실한 시간의 치유력 때문에 나는 점점 본래의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었고 그때쯤 비로소 아는 선배로부터 그녀와 내가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들을 수 있었다. 그것은…….

 

84~5년이 지나면서 학생운동은 이념적 성격이 강화되었고 정파의 분화 또한 가속화되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그녀와 나는 이 달랐던 것이다. 판화운동을 하던 그녀는 NL진영의 프랙션을 받았고 나는 PD로 정리하게 되었던 것인데, 문학회 회장이었던 나와 영문과 엄지로 소문났던 우리의 연애는 이미 교내에 소문이 무성하던 터라서 그녀의 선배들 또한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당시 학생운동 내 정파들은 무척이나 배타적이었다. 현실과 실천으로부터 동떨어진 어설픈 주의자 코스플레가 만연하였고, 타 정파에 대해 냉혹한 비판을 하면 할수록 자신의 활동적 선명성이 부각되는 것이라는 소아병적을 대부분 앓고 있었다. 그러니 민족을 강조하는 NL진영과 계급을 강조하는 PD진영이 어떻게 자연스레 어울릴 수 있었겠는가. 이후 두 정파 사이의 논쟁과 반목은 모두가 알고 있듯 매우 공공연하고 공격적으로 진행되었고, 그것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진영논리라는 낡은 프레임 속에서 재현되고 있는 중이다. 결국…….

 

이후 그녀는 건대투쟁에 연류 되어 구속이 되고, 나는 나대로 언더활동에 집중하면서 이별의 아픔(어쩌면 내 쪽에서만 겪은 실연의 아픔일 수도 있겠지만)을 희석시켜 나가긴 했지만 이후로도 오랫동안 노래나 음식, 기억을 공유하는 사람들 때문에 갑자기 그녀와의 추억이 떠올라 가슴이 덜컥 내려앉곤 했다. 추억은 힘이 센 법이니까. 그리고…….

시대가 우리를 갈라놓은 것이다.”....라고 말하면 괜스레 비장해 보이고, 오히려 로맨틱해 보이며 당시 이별의 상황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긴 하다. 하지만 더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돌이켜보면, 시대 탓을 하거나 정파 운운하는 것은 깨진 연애를 미화하거나 합리화해보려는 욕망일 뿐이지 꼭 그런 것만은 아니란 생각도 든다. 결국 우리에게는 모든 것을 넘어설 만큼 강렬하면서도 순정한 사랑이 없었던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 같은 것, 뭐 그런 생각 말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아픈 만큼 성숙한다라는 진부한 언명이 나에게는 결코 진부하지 않았다는 것, 객관적이란 자부는 할 수 없지만 그때 이후 나는 분명 눈과 맘이 깊어졌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