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의 힘을 확인한 성폭력 관련 집담회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을 때 대개의 사람들은 해당 사건의 폭력성과 가해자의 파렴치함에 대해 치를 떨며 성토한다. 더불어 사는 사회에서 그런 위험인물은 사회 안전을 위해서라도 마땅히 구축(驅逐)되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가해자가 자신의 지인이거나 이해관계에 얽힌 사람일 경우 갑자기 포즈가 달라진다. 다시 말해서 해당 인물과의 친소(親疏)에 따라 판단의 온도에 차이를 보인다는 것이다. 가해자가 자신과 전혀 관계없는 사람이었을 때는 그렇듯 맹렬하게 비판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관용의 화신들이 되거나 혹은 증거 제일주의를 지향하는 수사관들이 되어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겠지.”라든가, “고장난명이라고 했어. 어떻게 한 손바닥으로 소리가 날 수 있겠어. 원인제공을 한 거 아니야?” 등과 같이 이미 한쪽으로 경도된 발언을 서슴없이 하게 된다. 이러한 양비론(가해자의 가해 정도가 심각하고 증거가 확실한 경우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것이므로 고육지책으로 양비론을 펼 수밖에 없는 것이다)은 결국 추악한 범죄인 성폭력 사건의 본질을 희석시키는 동시에 가해자 쪽의 죄의 무게를 덜어 피해자에게 덤터기를 씌우는 2차 가해가 되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적반하장(賊反荷杖)과 견강부회(牽强附會)는 판단하는 이와 가해자와의 관계가 친밀할수록 더욱 심각하게 노정된다고 하겠다.
나는 이러한 사례를 한국작가회의 내에서 벌어졌던 고은 시인의 성희롱 사건 과정에서 명백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나중에는 친(親)고은파와 반(反)고은파로 분리되어 감정적이면서도 소모적인 언쟁을 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애초 쟁점이었던 고은 시인의 성희롱 문제는 증발된 채 전혀 본질적이지 않은 쇄말적인 것들의 폭로전으로 변질되는 과정을 아프게 목도했던 것이다. 비판하는 쪽에서 제기하는 고은 시인의 모든 행위가 친고은파 입장에서는 ‘관례’나 ‘어른의 재밌는 농담’으로 치환되어 용인되었다. 나는 이 과정을 목도하면서 성폭력 문제에 대한 대응은 개개인의 양심이나 양식에 맡겨둘 수만은 없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다시 말해 성폭력에 대한 심각성이나 그것이 안고 있는 폭력의 본질, 그리고 가해자에 대한 처리의 문제는 사회 저변에 흐르는 국민의 젠더 감수성이나 성 평등에 대한 인식이 바뀌지 않는 한, 올바로 파악하고 제대로 된 대안을 만들어내기 난망하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는 개인의 양심이나 양식에 맡겨둘 수 없는 것이다. 지속적인 운동, 홍보, 교육, 다양한 층위에서의 연대가 전제되어야 저 거대한 남성중심주의적 사고와 마초들의 견고한 여리고성에 흠집이라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 오늘의 집담회도 바로 그러한 문제의식에서 마련된 자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자리에서 대단하고 확실한 대안이 제출될 것이라고 믿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다만 성폭력을 포함한 모든 폭력의 문제는 공동체 안에서의 다양한 연대를 통해서 문제의 심각성을 공유하고 그 해결책을 공동으로 모색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소박하고도 거칠게나마 확인하는 자리였다는 것이 큰 의미라고 하겠다. 여기까지 오는 데도 만만찮은 시간이 걸렸고 앞으로 넘어야 할 산 또한 만만찮을 거라는 걸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든 팔과 다리를 서로 주물러주고 마음의 위로를 나눌 수 있게 해주는 연대의 힘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이 자리는 너무도 소중한 자리가 아닐 수 없다. 이 소중한 자리를 위해 개인의 시간을 쪼개고 귀찮고 자질구레한 수고로움을 아끼지 않은 후배들에게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