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강의 뒷물결은 앞물결을 몰아낸다
저녁이 되면서 눈발이 날렸다. 알량한 눈발이었지만 집요했다. 집요함은 가끔 물기를 지닌다. 집요한 사랑, 집요한 싸움, 집요한 욕망, 집요한 증오……. 그것들 중 집요한 욕망과 증오가 어제 작가회의 총회자리에서 표출되었다고 한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감기몸살 때문에 나는 회의에 참석하지는 못했다. 욕망과 욕망이 부딪치고 증오와 증오가 부딪쳐 서로의 가슴에 피를 뚝뚝 흐르게 만드는 집요한 싸움의 현장은 많은 후유증을 만들어 냈을 게 틀림없다. 아니나 다를까, 총회가 끝난 후 많은 sns에는 총회의 뒷얘기들이 무성하게 올라왔다.
특히 이번 총회는 얼마 전에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최영미 시인의 ‘me too’ 발언 이후 처음 갖게 되는 작가회의 식구들의 만남의 시간이었다. 어떠한 형태로든 그 문제에 대한 언급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 문제가 그리 심각하게 다루어지지 않았는지 임원선출방법에 대한 논쟁으로 허다한 시간을 허비하기만 하고 성희롱대책에 대해서는 미온적인 태도를 보인 집행부의 처사를 비판하거나 작가로서 자신의 태도를 자책한 글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그 모든 것들이 뭔가 조직의 분화가 필요한 임계점을 보여주는 현상들이 아닌가 생각된다. 알량한 선민의식과 잡지와 비평을 등에 업은 문단권력의 횡포로 얼룩진, 문단과 문학조직의 건강한 재편이 필요한 시점이 온 것이다.
중국 속담에 장강의 뒷물결은 앞물결을 몰아낸다는 말이 있다(長江後浪推前浪). 한 시대를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혹은 자족적으로 살아온 많은 삶들이 앞선 시절, 자신이 취했던 삶의 방식 때문에 이제 구축(驅逐)되어야 할 ‘악화’가 되어 살생부에 오른다. 나는 과연 앞선 시대의 부조리를 발본(拔本)하는 뒷물에 속하는가 아니면 뒷물에 의해 밀려나고 있는 앞 물에 해당되는가. 자신이 없다. 뻔한 반성은 얼마나 손쉬운 면피행위인가. 나는 지금 두 물살의 경계에서 떨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