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찾은 가정동 그리고 오리백숙
재단의 전횡과 관련한 대책회의를 위해 가정동 한신아파트를 찾았다. 어린 시절 자주 오고가던 곳이었지만 가정동 일대가 유원시티 건설을 위해 완벽하게 철거되고 난 후 도무지 방향 감각을 찾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마을 하나가 하루아침에 통째로 사라질 수 있는 것인지, 현대문명과 개발지상주의의 위세가 두렵기까지 하였다. 사라진 흙더미 속에는 마을을 일구며 살아온 사람들의 눈물과 한숨과 꿈과 희망이 함께 묻혀 있을 것이다. 인천지하철2호선 가정동 중앙시장 역에서 하차했을 때, 뒤쪽에 불쑥 솟아 있던 콜롬비아참전 기념비가 보이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도 한참을 헤맸을 게 분명하다. 지나가던 행인에게 물어물어 간신히 한신아파트에 도착했을 때, 온몸이 땀범벅이 되었다. 그 아파트는 건설될 당시 상당히 고급아파트로서 주민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퇴락해서 음산한 느낌마저 들었다. 여전히 붉은 벽돌로 외관을 올린 건물은 위용을 자랑하는 듯했지만 산언덕을 깎아 지은 탓에 모두가 동향인 건물과 비좁은 주차장은 요즘 새로 지어진 아파트들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여러 번 근처를 오고갔지만 실제로 단지에 들어와 보기는 처음이었다. 화가인 후배 고창수의 작업실인 16동 202호를 찾아 들어갔을 때, 아파트 내부는 비교적 넓고 효율성 있게 지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베란다도 넓고 수납공간이 곳곳에 있어 건축 초기단계에서는 확실히 고급스러운 느낌을 주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차도에 인접해 있는 동들의 경우, 여름에 문을 열어놓았을 경우 상당한 소음에 시달렸을 것 같았다. 방음벽을 설치하자니 볕이 들지 않거나 조망을 포기해야 하니 어쩔 수 없이 소음을 감수해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재개발을 염두에 둔 외지인들이 상당수의 가구를 형성하고 있거나 구입한 후 세를 놓고 있다는 얘기도 들었다. 사물도 공간도 사람과 더불어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을 새삼 확인하게 된 순간이었다.
회의는 한 시간 가량 이루어졌다. 당랑거철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확보하고 있는 조직의 역량에 비해 과도한 싸움을 준비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최근에 드러난 재단의 문제는 비단 재단 자체만의 문제가 아니라 재선을 염두에 둔 시 권력의 정치적 포석과 연동된 것이기 때문에 주요 타격 방향을 재단에 맞출 것이 아니라 인천시의 문화예술 정책에 대한 비판적 검토와 새로운 정권의 문화예술정책에 대한 의견 개진을 목표로 판을 좀 키워야 하지 않겠느냐고 제안을 했다. 판은 우리가 깔지만 문화예술인들만의 이슈 파이팅이 아니라 시민사회와 정치권까지 결합시켜야 문제의 심각성이 폭넓게 공유될 수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참석한 대책위원들도 대체로 나의 의견에 수긍을 했다. 그래서 향후 일정을 체크하고 역할을 분담한 후에 회의를 마쳤다.
회의를 마친 후 청천동으로 넘어가 오리백숙 집을 찾았다. 맛이 일품이었다. 그 동네서 77년을 살았다는 여 사장님은 자신의 요리에 대한 자부심이 만만찮았다. 술도 잘 마시고, 욕도 잘하고, 손님들의 테이블에 합석해서 잔소리도 끊임없이 하는 분이셨다.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손님들에게는 여간 불편한 사장이 아닐 수 없었다. 다만 조미료를 넣지 않고도 그런 풍미를 내기란 쉽지 않았을 텐데, 함께 간 일행들이 이구동성으로 칭찬을 하며 엄지를 들어 보인 걸 보면 음식 내공이 대단한 분인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인천의 맛집으로 입력 끝. 돌아오는 길은 미술위원회 김종찬 회장이 집까지 태워다 주어 편하게 올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