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일찍 귀가한 날

달빛사랑 2017. 9. 18. 22:26

하루를 현기와 기침 속에서 보냈다. 매일 운동을 하지만 절대적으로 나빠진 몸 상태가 심상치 않다. 술과 담배 때문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것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다. 몸이 보내는 신호를 만만하게 볼 일만은 아니라는 걸 최근 들어 절실하게 확인하고 있는 중이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 건 어린아이만이 아니라 내 몸도 그런 거 같다.

 

일찍 집에 들어와 책상 앞에 앉았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고즈넉함이 참 좋다. 정갈하게 꽂혀 있는 책들의 고집스러운 침묵도 싫지 않고 필요한 범위만을 비추는 스탠드의 겸손함도 그냥 좋다. 이전에는 모든 작업과 집중이 책상 앞에서 이루어졌는데 언제부턴가 책상 앞에 앉으면 머릿속이 하얘지고 잡념만 밀려와 좀처럼 책상 앞에서 집중하고 글을 써본 적이 없다. 사무실에서는 그렇지 않은데 유독 집에만 오면 그렇듯 무기력함이 밀려오는 이유를 알 수 없다. 아마도 밖에서의 업무와 집에서의 할 일을 잠재의식 속에서 구분하고 있었던 건 아닌지 모르겠다.

 

시집원고를 출판사에 보내고 난 후, 한 편의 시조차 쓰지 못했다. 생활이 전혀 시적이지 못하다는 것은 변명일 것이다. 일상의 모든 것들이 시의 소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詩作을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책임을 생활에 돌리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생활이 치열하지 못했다면 거기에 기반을 둔 성찰적 시가 나와야 하는 것이고 만약 생활이 누구보다 치열했다면 그 치열함의 표백으로서의 시가 나와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굳이 진단한다면 취중에 귀가하여 쓰러져 자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일 거라 생각한다. 집에 돌아온 후, 책상 앞에 앉아 고즈넉한 침잠의 시간을 갖지 못하니 시가 나오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를 들자면, 자꾸만 흐려지는 기억력 탓이기도 할 것이다. 반짝 하는 시적인 모티브를 떠올렸다 하더라도 그것을 메모해 놓지 않으면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는다. 그래서 노()대가들도 나이 들어서는 범작(凡作) 이상의 작품을 창작해 내지 못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나이가 들어갈수록 혜안이 생겨 세상이 이치와 사물의 본질을 깊게 통찰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기도 하지만, 그 또한 지난한 절차탁마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저절로 확보되는 미덕은 아닐 터이다. 세 번째 이유를 들자면, 인풋(input)의 양이 알량하다는 것이다. 아직도 시를 찰나의 인상을 잡아내는 천재적 감수성으로 쓰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이상 아웃풋(output)의 콘텐츠가 풍부해지기 끊임없이 무언가를 입력해야 하는 것이다. 입력하는 정보량은 턱없이 적으면서 대단한 결과물을 기대하는 것은 연목구어가 아닐 수 없다.

 

가을이다. 나에게는 상당한 변화가 기다리고 있는 계절이다. 당당하게 맞서자. 적어도 후배들에게 열등감과 질투를 느껴서야 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