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관처럼, 그렇게 또 판이 커지고
오혁재에게 전화를 받지 않았어도 갈매기에 들를 예정이었다. 의지보다 훨씬 무섭고 집요한 습관을 나는 키우고 있다. 오의 전화를 받고 갈매기에 들렀을 때 그곳에는 횡성의 집필실에 들어갔던 후배 시인 김산도 함께 있었다. 후배는 펜을 꺼내 “늘 고맙습니다”로 시작되는 육필 사인을 한 후 얼마 전에 출간 된 두 번째 시집을 전해주었다. 생각해 보면 특별히 그에게 인사를 받을 만큼 ‘고마운 일’을 해 준 적이 없었기 때문에 ‘고맙습니다’라는 표현은 의례적인 표현이라 생각을 했고, 시인은 모름지기 의례적인 것을 거부해야 하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을 잠깐 했으며 결국 나는 그에게 의례적인 인사말을 받아야 하는 단순한 선배일 뿐 깊은 관계는 아니라는 사실을 생각했고, 그 순간 그렇다면 깊은 관계란 무엇이고 깊은 관계 사이에서는 어떤 인사말이 오고가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봤는데 해답이 떠오르질 않았다. 물론 이 모든 것이 취기가 약간 오른 상태에서 순간적으로 스쳐간 생각일 뿐이라는 것. 의례적인 것이 필요할 때도 있는 법이다. 술을 마시면 이상한 방향으로 예민해진다. 가끔은 귀엽고 자주 귀찮다.
정확히 20분쯤 지나서 또 다른 후배 시인 손병걸에게 연락을 받았고, 한 시간쯤 뒤에 그는 도착했으며, 이번 달 24일, 그 역시 두 번째 시집의 출판기념회를 갈매기에서 열 계획이라고 했다. 올 봄에는 참으로 많은 시인들이 시집을 출간하고 있다. 내 시집은 출판기획위원회에 올라가 작업 중에 있으니 아마도 이번 가을쯤에야 나올 것이다. 앞서 시집을 출간하는 후배들이 부럽기도 하고 조바심도 나고 기분이 묘하다. 다시 30분쯤 지나자 원하일과 심명수, 그리고 김정균이 차례로 술자리에 합류했다. 일부러 약속한 것도 아닌데 또 다시 판이 커졌다. 이스트를 넣은 빵처럼 시간이 지나면서 판이 커지는 술자리. 나는 원하일과 10시 30쯤에 먼저 일어나 술값 일부를 중간 계산해 주고 술집을 나왔다. 하일이도 나도 지하철을 타야 해서 예술회관역까지 걸어가야 했는데, 역까지 가려면 광장을 지나야 하고, 에스컬레이터를 타야하고 긴 복도를 걸어가야 한다. 우리는 마치 여고생처럼 조잘조잘 수다를 떨며 그 길을 걸어왔다. 아마도 우리가 흘린 웃음들이 막차가 떠나버린 플랫폼 위에서 아직도 킬킬 깔깔 소리를 내며며 굴러다니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