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 대해 기록하다-(1)출생과 고향
나에 대해 기록하다-(1)출생과 고향
나는 충청남도 운산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태어나자마자 인천으로 올라왔기 때문에 태어난 곳에 대한 기억은 없다. 나중에 장성해서 찾은 운산은 그저 아버지와 숙부의 고향이었을뿐 나에게는 낯선 타지였다. 그래서 나는 태어난 곳은 아니지만 50년 이상을 살아온 인천을 고향이라고 생각한다.
현재 위로 두 분의 누님과 아래로 남동생 하나가 있지만 원래는 형님이 한 분 더 계셨었다. 잘 생기고 똑똑하고 심성이 고왔던 형은 내가 4살이 되던 해에 디프테리아에 걸려 외갓집에서 숨을 거뒀다. 그때 형의 나이는 9살이었다. 어머니는 친정에 장남을 데리고 가서 죽여 온 꼴이 되어버려 보수적인 시어머니, 즉 나의 친할머니로부터 엄청난 시집살이를 감수해야 했다. 결국 할머니는 어머니와 도저히 살 수 없다고 우기시는 바람에 내가 다섯 살 되었을 때 시골 작은댁으로 내려가셨고 결국 거기서 숨을 거뒀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할머니의 임종을 볼 수 없었다.
아버지는 장남이었지만 객관의 바람으로 사신 분이라 할머니에 대한 수발은 작은아버지 내외가 감당해야만 했다. 물론 시골에는 고모와 당숙들이 줄줄이 계셔서 할머니가 생활하기에는 낯선 인천보다 훨씬 편안했을지도 모른다. 형이 죽고 그 이듬해에 동생이 태어났다. 지금도 눈이 펄펄 내리는 날 예닐곱 먹었던 내가 곱은 손을 비비며 동생의 돌떡을 집집마다 돌렸던 기억이 선명하다.
내가 살던 마을은 막 개발이 시작되던 과도기적 마을이었다. 마을입구 쪽으로 걸어 나가면 버스가 다니던 신작로가 나오고 양옥집들과 제법 규모를 갖춘 가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을 안쪽으로 들어오면 여전히 상여가 나가고 품앗이가 일상화되어 있는 전형적인 시골이었다. 여름이면 우리는 인천 앞바다로 몰려가 수영을 하거나 마을 앞 개울을 막아놓고 멱을 감았다. 심심하면 복숭아 서리를 하러 경인고속도로 지하 배관을 엎드려 건너가기도 했고, 집 근처 비닐하우스에서 실하게 자라던 토마토나 오이를 서리해 먹기도 했다. 그리고 가끔 산에 올라가 칡을 캐서 먹기도 했다. 겨울이면 뒷산에 올라가 참나무를 베어 썰매꼬챙이를 만들고 철사를 구부리거나 함석판을 갈아서 썰매를 만들어 타고 놀았다.
그리고 형이 죽고 난 후 우리 가족은 모두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기 때문에 내 어린 날의 추억은 교회와 관련된 것들이 많다. 처음 다녔던 교회의 바닥은 마루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마루의 나무 틈 사이로 아이들은 헌금으로 가지고 왔던 십 원짜리 동전들을 많이 떨어뜨리곤 했다. 그래서 예배가 끝나고 나면 교회 옆으로 돌아가 땅과 마룻바닥 사이의 공간에 손을 넣어서 떨어진 동전을 줍곤 했었다.
그리고 유년시절 교회에 얽힌 추억을 이야기하자면 성탄절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크리스마스이브, 어린이들은 성경암송이나 성극을 준비해 교인들 앞에서 작은 공연을 펼쳤다. 수줍음이 많은 나였지만 그래서 결코 주인공을 맡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지만 나는 자주 성극의 주인공을 맡았다. 청년부와 중고등부 형, 누나들이 선물교환이나 성탄예배를 마치고 식당에 모여앉아 새벽송을 나가기 전 맛있게 먹던 뜨끈한 국밥 냄새가 지금도 선명하다.
어쨌든 나는 인천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인천에서 그런대로 평탄한 유년생활을 보내게 되었다. 보수적인 집안에서 장남에 대한 대우가 어떠했을 것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가난하고 배고팠던 시절이었지만 그리고 나 역시 배고픔을 경험했지만 그건 우리 가족만의 특수한 경험이 아니라 그 시절을 살던 사람들의 평균치의 배고픔이었을 뿐이다. 10명 중 8명이 겪었던 삶이라면 뭐 그리 서운하고 억울할 것이 있겠는가. 적당히 순진하고 가끔 말썽피고 그러나 여린 심성으로 나는 유년의 시간을 통과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입학 전 아버지가 사 오신 멜빵책가방(일본말로 란도셀)과 연필과 공책을 보고 설렜던 기억이 아직도 선하다. 내 인생의 화려했던 시절, 초등학교 시절은 그렇게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