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하루
늙음과 예술의 관계성 (10-30-수, 맑음) 본문
‘늙음’과 예술의 관계성에 관한 지극히 주관적인 낙서
본래부터 명사로 사전에 등재된 ‘젊음’과는 달리 ‘늙음’은 ‘늙다’라는 동사 어간 ‘늙’에 명사형 전성어미 ‘음’이 붙어 만들어진 파생명사(전성명사)이다. 즉, 형태로는 명사지만 뿌리는 동사라는 말이다. 젊음과 늙음, 두 단어의 태생이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일단 ‘늙다’의 사전적 의미는 ‘사람이나 동식물 따위가 나이를 많이 먹다. 사람의 경우에는 흔히 중년이 지난 상태가 됨을 이른다’, ‘한창때를 지나 쇠퇴하다’ 등이다. 즉 젊음은 일정한 시기나 상태를 지칭하는 단어라면 늙음은 생명 있는 존재의 필연적 과정이자 늙어버린 상태다. 계절로 따지면 가을 겨울에 해당할 것이다.
따라서 ‘젊음’의 반대말은 ‘늙음’이지만 ‘늙다’의 반대말은 형용사 ‘젊다’가 아니라 동사 ‘젊어지다’가 되어야 한다. ‘과정’의 의미를 품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늙는 일은 자연스러운 ‘과정’이라 ‘늙다’는 능동의 형태지만, ‘젊어지는’ 건 자연의 순리를 역행하는 것이어서 보조용언 ‘-어지다’가 붙어 피동의 형태가 된다. 이처럼 단어의 파생 과정만 보더라도 ‘늙음’의 의미는 분명해진다. 즉 늙음은 젊음을 상실하고 소멸을 향해 가는 슬픈 여정이다. 이 여정에는 예외가 없다. 생명 있는 존재는 모두 시간을 거스를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사물조차 낡아가고, 동물(여기선 온갖 짐승)들도 늙는다. 하지만, 동물 심리학자나 애니멀 커뮤니케이터들이 들으면 섭섭한 말이겠지만, 동물들은 비감해하지 않는다. 설령 비감해한다 해도 그걸 확인할 방법은 없다. 반면, 인간은 노화와 죽음을 늦추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러한 안간힘은 자연스러운 인간의 상정(常情)이지만, 간혹 그러한 안간힘이 예술과 만나면 통념을 타격하는 새로운 삶의 경험과 지혜를 담은 작품이 창조되기도 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늙음과 죽음을 다룬 예술이 적지 않은 이유는 그것이 예술가들에게 매우 매력적인 소재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테면 천재 화가 미켈란젤로의 스승이었던 도메니코 기를란다이오의 ‘노인과 어린 소년의 초상화’(1490년)나 화란의 화가 캉탱 마시의 작품 ‘추한 공작부인’, 또 스페인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의 작품 ‘늙은 여인들 혹은 시간’과 같은 작품들은 예술 혹은 예술가들이 ‘늙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또 어떻게 형상화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이 작품들은 단지 늙음의 비애만을 드러낸 게 아니라 늙음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를 고민하게 하는, 그야말로 늙음에 관한 철학적 접근을 시도한 작품들이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즉, 어차피 인간은 노화를 필연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면, 그것(늙음)을 생명 있는 존재의 숙명이자 자연의 순리라고 여길 것을 작품은 웅변한다.
늙음과 죽음을 다룬 문학작품들도 많은데, 그것들은 대개 몇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늙음에 대한 한탄(시조 ‘백발가’)을 직접적으로 드러낸 작품, 둘째는 늙음과 죽음을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순명(順命)의 태도를 드러낸 작품(한시나 향가처럼 유교나 불교가 배경이 된 작품들이 많다), 셋째는 늙음과 죽음을 주관적 관념과 의지로 초월하여 오히려 마음의 평화를 얻는 신선풍의 도가적 작품들이 그것들이다. 다산 정약용의 글이라고 인터넷에 떠돌고 있지만, 고증과 확인이 필요한 ‘노년유정(老年有情)’이란 글의 다음과 같은 언명 속에 담긴 의미를 읽어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나이가 들면서 눈이 침침한 것은 필요 없는 작은 것은 보지 말고 필요한 큰 것만 보라는 것이며, 귀가 잘 안 들리는 것은 필요 없는 작은 말은 듣지 말고 필요한 큰 말만 들으라는 것이고, 이가 싫은 것은 연한 음식만 먹고 소화 불량 없게 하려 함이고, 걸음걸이가 부자연스러운 것은 매사에 조심하고 멀리 가지 말라는 것이다. 머리가 하얗게 되는 것은 멀리 있어도 나이 든 사람인 것을 알아보게 하기 위한 조물주의 배려이다. 정신이 깜빡거리는 것은 살아온 세월을 다 기억하지 말라는 것이고(하략)”
그러나 긍정적 사고, 혹은 자기 세뇌의 극치를 보여주는 위와 같은 사고방식은 (이 글을 정말 정약용 선생이 쓴 거라면) 다산 정도의 경륜과 철학적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나 가능한 것이지 우리 같은 범인들은 솔직히 범접하기 어려운 수준이 아닐 수 없다. 차라리 가시와 막대로 오는 백발(白髮)을 물리치겠다는 ‘백발가’의 시적 화자가 훨씬 솔직하다고 하겠다. 아무튼! 많은 예술가와 묵객(墨客)들이 늙음과 죽음에 관한 철학적 통찰을 통해 그들의 작품에 새로운 깊이를 부여했던 건 사실인 듯하다. 그 반대로 늙음이 그들의 예술과 철학에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고.
그렇다면 늙음은 단순히 주름이 지고 기력이 떨어지는 신체적 변화만을 의미하는 건 아닐 것이다. (비유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우리는 가끔 ‘사고’란 추상어 앞에 ‘늙은’이나 ‘낡은’이라는 관형어를 붙이기도 한다) 앞서 말했듯 오히려 시간이 흐르면서 쌓인 경험과 감정은 예술가의 창작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이를테면 피카소는 나이가 들면서 예술적 스타일에 변화를 주기도 했고, 그 결과 그의 작품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가능하게 했는데, 이는 그의 ‘나이 듦’이나 삶의 경험과 깊은 관계가 있을 것이다. 진부한 말이지만, 위대한 예술가는 피카소처럼 늙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자신의 예술적 여정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문제는 어떤 예술가는 피카소일 수 있으나 모든 예술가가 ‘피카소’는 아니라는 것, 여전히 비애는 남는다.
늙음은 일차적으로 고독과 상실의 감정을 증폭시킨다. 그리고 예술가들은 그러한 감정을 작품에 담아 독자나 관객들의 깊은 공감을 얻어낸다. 결국 늙음은 예술가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창작과 변화를 위한 기회가 될 수 있다. 예술가들은 자신이 살아온 삶의 이력들을 돌아보며 자신의 예술 세계를 더 깊고 풍부하게 창조해 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늙음’은 아니지만, 범인에게 있어 늙음만큼이나 작가에게 고통을 주었던 신체적 고통과 감정적 상처를 위대한 작품으로 승화해 낸 프리다 칼로와 같은 작가도 있다. 칼로는 고통을 통해 오히려 자신의 정체성을 찾았고, 이는 그녀의 예술을 더욱 강렬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작품은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그녀의 삶과 죽음, 사랑과 상실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다. 이런 걸 보면 고독과 상실감이 한 예술가의 창작혼을 말살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작가 프란츠 카프카 역시 그의 작품에서 죽음과 존재의 의미를 깊이 탐구하였다. 그의 글은 인간 존재의 고뇌와 불안, 그리고 죽음에 대한 성찰로 가득 차 있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다시 던져 보는 원론적인 질문 하나, ‘도대체 예술가는 어떤 사람인가?’ 내가 생각하는 예술가란 단순히 글과 그림을 위해 붓을 들거나,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 그 이상이다. 예술가는 세계와 인간, 사물과 현상의 관계와 본질을 탐구하고, 그렇게 탐구된 진실을 다양한 수단을 매개로 표현하는 존재들이다. 그런데 이런 ‘거룩한 작업’을 하는 예술가들 또한 유한한 인간이다.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존재이다. 아무리 위대하고 아름다운 작업도 예술가에게 삶의 영속성을 보장하지 않는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언명은 예술은 시대를 초월해 그 향기를 내뿜는다는, 예술에 대한 상찬의 말이기도 하지만 인간의 삶이 무척이나 짧다는 탄식이기도 하다. 죽음을 초월하겠다는 예술가들의 기개는 어쩌면 저 들판의 1년생 들꽃처럼 허무하게 시들고 싶지 않다는 심정의 반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많은 걸 성취한 사람일수록 늙음과 죽음을 더욱 두려워하게 된다. 그에게 세상은 젊음의 생기와 아름다움만을 이상화하고 늙음을 외면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니 나이 든 예술가에게 ‘늙음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합니다’라고 교과서처럼 쉽게 말하는 건 뺨 맞을 일이지 예의가 아니다. 그럼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사실, 늙는다는 것은 많은 걸 견뎌야 하는 일이다. 보철(補綴)의 불편함과 관절의 덜걱거림과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불면과 숨참과 두통과 자꾸 희미해지는 기억력과 자신을 배제한 채 이루어지는 관계의 서운함과 휘황한 자본의 거리에서 겪게 되는 누추함과 모멸과 때때로 흐르는 눈물과 품을 벗어나려는 자식들의 투정과 노부모의 굽은 허리와 눈물 젖은 눈과 화사한 꽃들의 유혹과 바람의 치근댐과 새들의 노래를 견디는 일이다. 또한 그 모든 게 자연스러운 일이고 죽음은 늘 지근(至近)에서 동행하고 있다는 것을 수긍하는 것, 늙는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다.
하지만 예술가와 늙음의 관계는 복잡하면서도 깊다. 예술은 인간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여정이며, 늙음은 그 여정의 중요한(긍정적인 면에서든 부정적인 면에서든) 부분이다. 예술가는 자신의 삶을 통해 느끼는 모든 감정을 작품으로 표현하며, 이는 결국 우리(예술가들)가 삶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기념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예술은 우리의 존재를 기록하고, 그 속에서 의미를 찾는 과정이다. 늙음 역시 인간, 더 나가 자연의 거스를 수 없는 순리이자 필연적 과정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럴 사람도 없겠지만) 억지로, 무조건 늙음이나 죽음을 예찬할 필요는 없다. 미치지 않고서야 도대체 그 어떤 예술가가 늙음을 ‘일부러’ 환영하고 예찬하겠는가.
다만 예술가는 그 필연적 비애를 예술적으로 승화해(한다고 착각하면서) 스스로 위안하고, 반어적으로 슬픔을 표현하고, 자주 비장한 깨달음을 작품으로 형상화하면서, 다시 말해 어쩔 수 없이 견디는, 그렇게라도 두려움을 희석하기 위해 작품을 창조하면서 더욱 깊은 창조의 세계, 마약처럼 자주 위로가 되는, 자기 부정과 긍정이 뫼비우스띠처럼 연결된 세계, 예술인 줄도 모르면서 은연중에 예술을 만들어 내는, 그런 세계로 나가는 것일 뿐.
물론 나는 아름답고도 깊은 울림을 주는 작품을 얻기 위해 ‘늙음’에게 우호적일 생각은 추호도 없다. 아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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