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하루
오늘의 만남, 낯설거나 익숙하거나(02-13-월, 종일 흐림) 본문
■날은 종일 흐렸습니다. 한낮의 기온은 영하는 아니었지만 해가 없어서 종일 을씨년스러웠습니다. 옥상에 올라갈 때마다 비서실장은 "와, 날씨 한 번 참 거지 같네요" 하며 투덜댔습니다. 흐린 날씨에 먼지의 질도 좋지 않아 무척 화가 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먼지의 질을 생각하며 담배를 피우는 건 뭐지요? 매연 가득한 실내에서 독가스를 보너스로 마시는 형국입니다. 한편, 나는 나대로 기분이 꿀꿀했습니다. 드라이클리닝을 하지 않고 집에서 자가 세탁한 후 입고 나온 코트가 생각보다 너무 우중충해서 속상했던 겁니다. 테이트 매장에서 비싼 돈 주고 구매한 옷이고 몇 번 입지도 않았는데 왜 이리 허름해 보이는 걸까요. 그러고 보니 청바지의 무릎도 너무 늘어나 있는 거 아니겠어요? 홀아비 티 내는 것도 아니고, 나 원 참! ■점심에 보운 형과 양평해장국을 먹었는데, 내용물이 너무 질겨서 씹느라 고생했습니다. 돼지국밥과 양평해장국 중 하나를 골라보라고 했더니 선지 마니아인 보운 형은 (선지가 듬뿍 들어간) 양평해장국을 선택했습니다. 오늘은 내가 점심을 사주고 싶어서 메뉴 선택권을 보운 형에게 주었던 것입니다. 씹기는 힘들었어도 양평해장국을 먹으면 다른 음식을 먹었을 때보다 속이 든든합니다. 포만감이 크다는 말이지요.
■오늘 저녁에는 동창 기홍이와 그와 함께 나오는 27회 후배 2명을 만날 예정입니다. 요즘 좀처럼 구월동에서 술 마실 일이 없었는데, 모처럼 구월동에서 약속이 잡힌 김에, 나 역시 며칠 전부터 소주 한잔하자고 연락해 온 상훈이를 핑곗김에 불렀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상훈이도 27회 후배였습니다. 그러니까 기홍이가 데리고 올 후배들과 상훈이는 고교 동기였던 거지요. 일부러 확인하진 않았지만 그들은 서로 아는 사이겠지요? 설마 3년간 같은 학교를 다녔는데 서로 모른다면 그게 더 이상하잖아요. 물론 절친이었는지 그냥 얼굴만 아는 사이였는지는 다른 문제일 것이고. 기홍이가 데리고 나오는 후배들은 서울대 출신이고 상훈이 역시 나와 같은 연세대(경영학과) 출신이니 모르지는 않을 겁니다. 전교에서 놀던 친구들은 모를 수가 없거든요. 암튼 재밌게 되었습니다. ■다만 궁금한 것은, 오늘의 술자리는 후배 두 명이 나를 만나게 해달라고 기홍이에게 부탁해서 마련한 자리라는데, 사업하는 그들이 도대체 나에게 뭘 물어보려는 것일까요? 만나보면 알겠지만, 불편한 자리가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현재 시각 3시)
■정확하게 5시 30분, 약속 장소에 도착했습니다. 기홍이가 나와서 어디론가 전화하고 있었습니다. 약 10분 후 늙스구레 한 후배 2명이 들어와 인사를 했고, 곧바로 상훈이가 도착했습니다. 예상대로 상훈이와 27회 후배들은 아는 사이였습니다만 두 명 중 한 친구와는 별로 친한 것 같진 않았습니다. 예상했던 대로 오늘 만남은 기홍이가 주선했지만 아주 담백하고 순수한 자리는 아니었습니다. 약간 불편했으나 눈치 빠른 후배가 "오늘은 얼굴 뵙고 인사드리는 자리니 사업 얘기는 그만하지요." 하며 말을 끊더군요. 그 순간만큼은 고마웠습니다. 일행들은 나만 빼고 다들 담배를 피우러 몰려나가곤 했는데, 비흡연자 혼자서 멍하니 앉아 일행들이 돌아오길 기다리는 심정이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하지만 그렇잖아도 갈매기에 눈치가 보였는데, 나갈 일 없으니 다행이기도 했습니다. 다른 친구들은 2차로 노래방을 갔고, 나는 취기도 오고 노래방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양해를 구한 후 전철 타고 귀가했습니다. 2월 중순인데도 한밤중은 겨울이네요. 집에 들어왔을 때 온몸을 감싸는 이 낯익은 따스함이 너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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