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평범한 하루
관음증에 대한 신랄한 풍자, 연극 <각다귀들>을 보다 본문
기문은 유명 프로그램의 피디 겸 진행자이다. 그는 언제부터인가 국민의 ‘알 권리’를 내세우며 스타들이나 유명인들의 사생활을 파헤치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 극의 도입부에서도 기문은 김희설이라는 여배우의 섹스동영상을 확보, 공개하려는 계획을 밝히고 있다. 그의 후배는 기문에게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느냐며 계획을 보류하자고 제안하지만, 방송사 국장의 닦달과 시청률에 대한 욕망 때문에 후배를 몰아붙이며 계획을 실행해야 한다고 강변한다.
그런 기문의 가족이 ○○마을 11번지로 이사를 오게 되는데, 이사오던 첫날부터 기문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친절한 마을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들은 이후 기문의 팬임을 강조하며 시도 때도 없이 기문을 집을 제집처럼 드나들며 기문과 가족의 삶을 어지럽게 만든다. 기문의 아내는 모종의 사건으로 유산경험이 있는 여성인데, 그 모종의 사건이 어떤 것인가는 이후 극이 전개되면서 마을사람들의 입을 통해 단서가 제공된다. 또한 마을사람들로부터 기문이 이사한 집이 사실은 기문에 의해 사생활이 폭로될 위험에 처한 여배우 김희설이 살던 집이란 사실도 밝혀진다. 마을사람들 중 인터넷회사 직원은 기문의 집에 들어서자마자 쓰레기봉지를 뒤져 기문과 그 가족의 사생활이 드러난 자료를 모은다. 통장과 마을 아낙은 막무가내로 거실을 차지하고 커피집 알바생인 젊은 여성은 기문 가족의 일거수 일투족을 카메라에 담아 SNS에 올린다. 기문은 이들에게 자신의 사생활을 보호해달라고 호소를 하지만 11번가 사람들은 알 권리를 주장하며 안하무인, 기문의 사생활에 대한 간섭과 염탐을 계속한다. 이런 것을 견디다 못한 부인과 딸은 기문에게 이사가자고 애원하지만 정작 기문은 과민반응이라며 이들의 요구를 무마하려고만 한다.
마을사람들의 이러한 행태가 반복되면서 관객들은 제목이 왜 ‘각다귀들’인가를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각다귀는 떼로 몰려다니며 짐승이나 사람의 피를 빨아먹는 해충인데, 마을사람들은 기문 가족에게 바로 그런 존재이기 때문이다. 한편 기문은 가수 지망생인 딸과는 소통의 부재를 보여주고 있는데, 전국민을 상대로 소통하고자 애를 쓰는 기문이 정작 가장 가까운 가족들과는 소통을 이루지 못하는 모습은 무척이나 역설적으로 보인다. 결국 기문에게 각다귀들인 마을사람들로 인해 기문의 아내는 유산을 하게 되고, 기문과 딸은 스트레스 때문에 미쳐버릴 지경에 이른다. 그러는 과정에서 기문에 의해 섹스동영상이 공개된 여배우 김희설이 음독자살하게 되는데, 이 사실을 듣고 기문은 충격을 받는다. 김희설에게는 기문이 각다귀였던 셈이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전도되는, 다시 말해서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고 피해자가 다시 가해자로 변할 수 있다는 이 장면을 통해서 작가는 현대인들의 관음적 행태를 풍자하고있는 것이다.
결국 기문은 부인과 딸과도 헤어져 술에 의존하며 폐인처럼 살아가게 된다. 그리고 하얀색 가면을 쓴 각다귀들이 자신의 얼굴을 향해 카메라를 들이미는 환영을 보며 비명을 지르는데, 재밌는 것은 극의 마지막 장면에서, 초반부에 등장해서 기문의 폭로행위에 문제를 제기했던 후배 피디가 실성한 듯 머리를 쥐어짜며 괴로워 하는 기문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다는 것이다. 후배 역시 방송메커니즘과 시청률, 그리고 자신의 출세를 위해 누군가에게 각다귀가 되어버렸다는 것을 암시하는 장면일 텐데, 이 부분은 정말 관객들의 마음을 서늘하게 만든 장면이라 할 수 있다.
후배 이은선이 연출한 이 연극은 5일부터 7일까지 학산소극장에서 공연된다. 빗속이라 그런지 객석에 빈자리가 많이 눈에 띄어 아쉽웠지만 배우들의 연기도 안정적이었고, 무대도 극소화된 소품들을 가지고 효과적으로 운용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아깝지 않은 연극이었다. 청소년들이 많이 관람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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